사색 365

문제도, 답도 만나는게 아니라 만드는 것.

나 아닌 내 2012. 11. 16. 23:02

그 어떤 문제도, 그걸 가진 사람의 두뇌 속에서 만들어 져 있다.

문제가 있는 그 뒷면에 해답이 있으니 그 또한 문제 소유자의 두뇌 속에서 만들어 져야 있게 된다.

 

사람의 두뇌 바깥에는 그 어떤 문제(해답 또한 마찬가지)도 없다.

사람들이 자기 두뇌 바깥의 어떤 사람, 사물, 현상에 "문제"라는 말을 붙이기라도 하는 것 처럼 알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 어떤 대상에 "문제"라는 말을 붙여서 "문제인 사람"으로 만들었더라도 거기서 "문제"라는 말만 떼어 내면 그만이게?

 

사람들에게 소위 말(특히 의미어)의 투사, 투영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누군가에 관하여, 내 두뇌 속에 "좋은"이라는 말이 투사되면 그 사람이 마치 "좋은 사람 아무개" 처럼 투영되어 알게 되는 현상이다.

실제로는 외부의 그 어떤 대상에 말을 붙일 수도 없고, (그러니) 붙지도 않은 말을 떼어 내는 일이 불가능하지만,

위에 말한 말의 투사와 투영이- 투사와 투영이 아니라- 마치 실제로 말과 같은 사실인 것 처럼 착오(착각)를 일으킨다.

 

"문제"도 말 이다.

글자로 써 놓은 "문제"가 그대로 문제가 아니고, 그 것을 두뇌 속에서 "문제"라는 말과 연결해 놓아야 문제가 된다.

두뇌 바깥의 그 어디에도 "문제"라는 말(글)을 붙일 수 있는 것이 없고, 설사 "문제"라는 말을 붙일 수 있더라도 그게 붙은 사물이나 현상이 문제 사물이나 문제현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문제"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연결되어) 있는가?

바로 두뇌 속 의식계의 어떤 이미지(정보나 상상 = 識)에 "문제"라는 말이 연결되어 있다.

홍길동이라는 실제의 사람에게 "문제"라는 말이 붙는게 아니라, 내 두뇌속에 있는 "홍길동 이미지(識)"에 "문제"라는 말이 연결된다.

그런 문제의식(즉, 문제라는 말이 연결된 이미지)이 투사되는채로 두뇌 외부의 홍길동을 보니, 실제의 그 사람이 그런 "문제인 홍길동" 처럼 투영되어 알려진다.

 

이상은 제대로 알거나 모르거나 어느 정도 살아 온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일 이다.

그렇게 "문제"를 만나고, 그 문제에의 "답"을 찾으려고 애 쓰는 일도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고.

그런데 그 "문제(해답도 마찬가지)"라는 것의 정체(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만나는 문제만 수동적으로 만나고,

자신이 찾게 되는 답만 찾아서 알게 되는 식으로 사는 게 대두분의 사람들이다.

 

문제(와 그 해답)의 정체가 자기 두뇌 속에 있는 의식(意識)의 일부임을 안다면, 그 의식에 대한 관리(창조, 수정, 무효선언등) 능력의 일환으로 어떤 문제라도 새로 만들거나, 기존의 문제를 수정 또는 무효화 하거나, 해답 또한 애써 찾기 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넣고 내는 일을 훨씬 자유롭게, 쉽게, 유익하게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이 

1. 문제 삼을 필요가 있는 일을 문제삼지 못 하는 것

2, 문제의 실익이 없이 해롭기만(소위 백해무익)한 문제를 무효화 하지 못 하는 것

3, 문제의 답을 찾겠다고 고뇌하면서 찾지도, 스스로 만들지도 못 하는 것 등등의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시기를 권한다.